김영숙
영화는 정갈한 제사였다.
상방, 그곳은 제를 지내는 공간이다.
그곳에 먼지가 부옇게 쌓여 있다.
소중한 젯그릇(제사용 놋그릇)이 뒹굴고 무심한 바람이 지나간다.
군홧발이 아무렇게나 여기 저기 훑고 다닌다.
시선을 따라 흑백이 되어버린 서러운 넋들이 숨죽이고 바라본다.
아! 영화가 시작되면서 벌써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제사상에 제물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고 촛불을 밝히고, 제 지낼 시간을 기다리며 소곤소곤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던 어른들이 생각난다. 그 어른들은 돌아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 나누지 않았다. 누구 장가가는 이야기, 누구 밭 산 이야기, 누구 아픈 이야기, 누구 육지 간 이야기 ..... 그냥 살아있는 사람들 이야기만 나누었다. 어린 우리들은 오랜만에 만난 또래들끼리 정신없이 놀았다. 제를 지내고 나서 나누어지는 반(飯)을 기다리며 졸린 눈을 비비다 정작 제를 지낼 시간이 되면 이 구석 저 구석 쓰러져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다음 날 아침, 반을 돌리러 옆집에 가면 그 집에서도 반을 주셨다. 그 때는 지난 밤 온 동네가 다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왜 그런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우리 집 제사에 정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가깝고 먼 친척 댁의 제사에 반드시 참례했다. 그리고 어린 우리들을 꼭 데리고 다니셨다. 달빛 쏟아지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는 돌아가신 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나는 누구 제사인지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 우리 집에서 지내던 제사 중에는 장가도 가지 않은 삼촌 제사도 있었다. 그 삼촌은 백조일손지지에 백 명이 넘는 원혼들과 뒤섞여 누워 계시다.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그 자손은 하나다.’ 4.3 항쟁 막바지였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해 8월 20일,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잡아들인 사람들을 섯알오름에서 사살하고 그곳을 민간인 접근금지구역으로 정해 놓아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6년 만에 유골을 수습하려고 했을 때는 누구 시신인지 누구 뼈인지 구별할 수 없어 결국 132구의 유골을 한 곳에 모시고 위령비를 세웠다. 그곳이 백조일손지지이다. 당시 15~20세가 14명, 21~30세가 71명.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죽어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꽃 같이 젊은 나이에 자기 나라 군인들에게 학살당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더구나, 5.16 쿠데타 이후 경찰에 의해 위령비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으니 억장이 무너진다. 아버지는 그때 죽어간 동생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평생 그 제사를 정성껏 모셨다.
그게 몇 살 즈음이었을까? 외할머니는 제물을 준비하고 어린 우리 남매를 데리고 밤길을 나섰다. 어디를 왜 가는지 모른 채 무서워서 졸음도 다 달아난 밤길을 할머니를 놓치지 않으려 뛰다시피 좇아갔다. 어느 무덤 앞에 우리 남매를 앉혀 놓고 심방(무당)은 작은 굿을 벌였고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아 빌고 또 빌었다. 몸이 유난히 약했던 나와 툭하면 경기를 하던 동생에게 붙은 외로운 넋을 위로하는 굿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오래된 무덤조차도 신이 깃든 곳이라 여기고 정성을 쏟는 제주도 어른들은 수많은 신당을 만들어 놓고 신들과 더불어 살며 정성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제주 어른들이 그리 살아오는 것은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억울하고 서러운 넋들이 바람과 함께 우리 곁에 떠돌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제주 태생인 감독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주 앞 바당(바다)을 건너온 겨울 칼바람 소리를 모르고서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가 한라산 중산간 마을을 맴돈다. 나는 바람을 타고 상방, 구들, 굴묵, 우영, 통시와 올레를 여기 저기 둘러보는, 한없이 서러운 우리 삼촌들의 원혼을 영화를 보는 내내 만났다. 그들은 한없이 순박하고 겁 많고 힘없는 정말 보통 사람들이었다. 왜 죽어야하는지도 모른 채 제 나라 군인들이 쏘아대는 총탄 앞에 속절없이 스러져 간 자신의 죽음을, 아직도 숨죽인 채 바람 소리에 숨어 슬며시 들여다보는 그 넋들에게 지내는 제사가 어찌 소홀할 수 있을까? 감독은 제주도 사람 뿐 아니라 우리나라 온 국민들과 더불어 그 억울한 모든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정성껏 지내고 싶었으리라. 실제로 오멸 감독은 장면 한 컷마다 지방을 쓰고 제를 지내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한다.
이제 영화는 죽음이 있던 곳마다 소지(燒紙)를 올리며 도저히 불가능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아직 그 외롭고 서러운 넋들을 위로할 제사를 완성할 수 없다. 후손들에게 4.3이 어떤 역사였는지 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없는 동안에는, 4.3을 폭도들이 일으켰다는 자들이 뻔뻔하게 살아있는 동안에는, 4.3의 죄인들이 진심으로 무릎 꿇지 않는 동안에는 그 넋들이 소지와 함께 하늘로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과 함께 나는 지독하게 아픈 이 제사에 참례하여 우리 삼촌을 포함한 모든 가엾은 넋들에게 눈물로 평안하시길 기원했다. 제대로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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